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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1915)을 읽고서

'변신'을 처음 접한 것은 분명 초딩 때 영재교육원 국어 시간이었다. 딱히 남은 건 없는 영재원 수업이었지만 카프카의 '변신'을 배웠던 시간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의 성인 남성이 하루아침에 혐오스러운 벌레로 변하고 만다는 밑도 끝도 없는 부조리는 어린 마음에도 실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혹시 내가 벌레가 돼버린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걱정이 자꾸만 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운명처럼 다시 내게 찾아왔다. 어릴 적 감상했던 작품을 지금의 바뀐 환경에서 다시 감상하는 경험은 참 흥미롭다. 카프카의 '변신'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내게 호소력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부조리의 공포였다. 어릴 적 느꼈던 막연한 공포가 이번에는 더욱 통렬한 공감을 바탕으로 바로 몇발짝 앞..

<점 위의 서커스> 시

점 위의 서커스정적만이 들려오는 어두운 시각과거의 내음에 숨이 막혀 창을 열면차가운 입김이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고꾸라지고자 나서는 몸뚱이와 반대로고개는 쳐들어, 젖히고 눈을 떠새끼 동물과 같이 위태하게 부들댑니다이 순간 내 눈동자는 검게 물듭니다까만 천막이 온 세상을 빈틈없이 뒤덮고 있어우리들이란 그 밖은 꿈도 못 꾸며 재롱부리는 원숭이들이라고 해야 적확하겠습니다검은 하늘이 항상 우리를 압도하고 굽어보고 살피지는 않고그러한 감상에 빠지면서도 눈을 돌리지는 않고그저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자니다음 순간 내 눈동자엔 불꽃이 튑니다시선이 닿는 곳곳에 구멍이 뚫리더니하나같이 선명한 빛으로 닿아오는 것입니다너무나도 찬란한 나머지 무게도 잊고 몸을 쭉 뻗어보는 것입니다모든 원숭이들의 속에 잠들어 있던 무력감과 고양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1864)를 읽고서

우리네 삶의 목적은 최대한 행복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리를 끊어먹은 듯이 글을 쓰는 데 익숙치 못하다. 그러나 지하인간의 수기에 대한 리뷰로서는 적절한 형식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주장을 하는 이들 중에 있어 진실로 최대 행복을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을 쏟는 이는 보지 못했다. 행복을 위한 구차한 노력이 빈번히 본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란 존재만큼 아이러니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대다수가 모순덩어리라 본인은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이 선언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그는 이미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도리어 관성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불행을 좇아 기어들어간다. 축축하고 아늑한 비탄의 ..

히가시노 게이고 '용의자 X의 헌신' (2006)을 읽고서

발간 당시부터 각종 상을 휩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이다. 반전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극후반 밝혀지는 반전에 모든 걸 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왜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라인업에 빠지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에 대해 그정돈가?라는 평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첫째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다. 주변에서 하도 다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기대를 잔뜩 한 내 탓도 있다만... 분명 재밌게 읽었지만 막 그정도로 대단하다고 느끼진 못했다. 그정돈가라는 표현엔 그런 의미가 있다. 둘째로, 개인적인 취향에서 빗겨갔다. 특히 결말부가 말이다. 주인공 이시가미가 사랑하는 여자의 살인을 덮기 위해 또하나의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본 ..

가스통 르루 '노란 방의 비밀' (1907)을 읽고서

무려 1907년작인 노란방의 비밀은 최초로 밀실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본작에는 두 개의 거대한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첫째는 직전까지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던 것이 분명한 노란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범인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노란 방은 분명한 밀실 상태였다. 둘째는 T자 모양 복도의 각 끝자락에서 세 명의 인물이 범인을 쫓았지만 복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범인을 붙잡기 직전 범인이 증발한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알 것이다. 이후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은 정말 논리적이고 명확하다. 본문에서 말하듯, 진상을 알고 나니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간단해보인다. 불가능한 미스터리와 깔끔한 진상, 고전답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본 작품의 소년 탐정 조셉..

아야츠지 유키토 '십각관의 살인' (1987)을 읽고서

신본격 미스터리를 이끈 그 유명한 십각관의 살인을 읽었다. 꽤 재미있었고 반전도 신선했다. 이 책이 나온 시기를 생각하면 감안해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반전을 설정하고 제시하는 방식이 영리했다고 생각한다. 트릭이 뛰어난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범인은 우연성에 많이 기대어 살해를 시도했다. 아가사의 립스틱에 독을 칠해놓은 것, 담배에 독 칠해놓기, 계단 앞에 낚시줄 묶어놓기 등은 실패 가능성이 꽤 있는 살해 방법들이다. 그렇다고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2중, 3중의 대비책을 준비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범인이 은근 허술하다고 느껴졌다. 청옥부에서의 살인과 현재 십각관에서의 살인을 연결지어놓은 방식도 독자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작위적이다. 마치 청옥부에서의 살인을 모방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첫 두 구의 시체에서..

김명준 '우리 학교' (2007)를 보고서

'우리 학교'는 재일동포 1세들이 조선의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세운 조선학교에 다니는 초등부터 고등까지의 재일동포 자녀들을 취재한 다큐 영화이다. 이곳은 조선의 남겨진 아이들이 일본 땅에서 살아가며 뒷전으로 두기 쉬운 우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우리말을 가르치고, 교복으로서 치마저고리를 입게 하며, 우리 민족 역사를 가르친다. 국어, 수학, 예체능 등의 일반적인 학교 교육이 그뒤에 따라오는 구조이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고 생각된다. 화면 너머로 보여지는 재일동포 3세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순박하고 티없이 맑다. 감독이 3년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며 가졌을 깊은 애정을 고작 두 시간만에 동일하게 체감할 수 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천진난만하게 눈을 빛내는 아이들의..

나홍진 '호프' (2026)를 보고서

기대를 안하고 봐서 세간에서 욕먹는 정도로 구더기는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다들 호평하는 초중반부 괴물 추격씬과 카체이싱은 체급이 정말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소 한 마리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다음으로는 시체가 발견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날뛰며 쑥대밭이 되어가는 마을,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괴뮬의 정체를 유추해가는 주인공과 관객들,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 건물 천장을 부수며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 괴물까지, 이건 영락없는 웰메이드 크립티드 호러물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숲에서의 추격전, 도로에서의 추격전이 반복되며 영화는 루즈해집니다. 마을에서의 첫 추격전만큼의 임팩트는 더이상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사적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유지시켜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 우리는 제대로된 서..

제임스 완 '쏘우' (2004)를 보고서

옛날부터 관심있다가 스티븐 킹이 추천하는 공포 영화 목록에 있길래 이번 기회에 보게 되었습니다. 고어물로 워낙 유명한 시리즈라 잔뜩 긴장하고 봤는데 1편은 수위가 생각보다 약하다고 느꼈습니다. 오히려 직쏘 인형이 주는 분위기, 등장인물들의 치닫는 감정과 후반부 장면의 서스펜스, 최후의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스티븐킹이 왜 추천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밀실에 갇혀서 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에 심한 패닉에 빠지는 주인공 고든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샤이닝의 잭을 연상시킵니다. 즉 단순히 고어한 장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에 공감하며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지막 반전이 조금 억지라는 평에는 일부 동의합니다만 몰입을 방해할 정도의 개연성 파괴가 아니어서 괜찮았습니..

타셈 싱 '더 폴' (2006)을 보고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스턴트맨을 위한 최고의 헌정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로이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봐서 그가 물에 빠진 자신을 익사하도록 내버려둘지 끌어올릴지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고 침대에 얼굴을 파묻는 장면이 공감되고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단순한 표정 연기를 넘어 1초 단위로 삶의 방향을 갈등하는 그 심정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코끼리를 타고 동화처럼 시작되는 액자 속 모험담이 로이의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비정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변모하는 구성도 참 좋았습니다. 하필 그걸 들려주는 대상이 고작 5살 난 꼬마 여자애라는 것이, 아이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는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점에서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한 로이의 마음 상태가 너무 잘 드러납니다. 소설을 쓰려고 하는 입..